만항재를 올라갔지
한나절 내내 장대비에 시달리다
등짝을 후려치는 안개 속
내게 손짓하는 이무기를 따라온 거야
정암사 적멸보궁 지나
해발 1000미터를 견디지 못해 귀가 먹먹해지더니
빈 사택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비탈을 도는 동안
다섯살 때 저 재를 넘어간 어머니를 보았어
이쪽에서 편안히 살아온 내게 금지된 곳
사방에서 검은 눈물 흘리는 폐광처럼 지켜보는 곳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이
둥근이질풀 동자꽃 물양자꽃 흘리고 간 곳
온 길 돌아보면 천둥이 쏟아지고
영월에서 정선에서 태백에서
사나운 안개가 짖어대며 달려드는 곳
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그곳에 갇혀버렸어
솔밭에서 잔등이 덥도록 토하고 나면
사방에 빗장 지르는 밤이 내리고
거대한 무덤 속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만항재에서 말야
/ 전윤호
* 전윤호 시인은 1964년 정선 출생으로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2002년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순수의 시대>,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 <연애소설> 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한국판 어린 왕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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