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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희의 雜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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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내 이름은 투사
제목 단편소설, 내 이름은 투사
작성자 강기희 (ip:)
  • 작성일 2008-09-01 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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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투사

 

 

 

눈이 내린다. 사북 읍내가 온통 눈으로 덮여있다. 검게 그을린 산자락도 오늘은 흰옷으로 갈아입었다. 우리 집은 산중턱에 지어져있다. 사북에서 가장 높은 집이다. 집 마당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북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 덮인 사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눈이 녹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산자락으로 많은 집들이 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던 시절, 바람이나 피하자며 지은 집들이라 옹색하기 이를 데 없다. 산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술주정을 해도 건물 벽은 절대로 발로 차지 않는다. 자칫 실수를 하게 되는 날엔 집이 폭삭 무너지기 때문이다.

마주 보이는 산은 아버지의 무덤이다. 아버지는 지하 2천 미터나 되는 곳에 묻혀있다. 매몰 사고가 나던 날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다. 임신 8개월이라 했다. 엄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엄마는“나 혼자 어찌 살라고!”라며 소리를 지르다 쓰러졌다. 그때의 충격으로 난 8개월 만에 세상에 나왔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동민이라는 이름 대신 팔삭이라고 불렀다.

내 뒤를 따라 나온 여자 아이는 핏덩이로 나왔다. 그 아이는 울음 한 번 터트리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가 날 살렸다고 했다. 21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아버지처럼 탄 더미 속에 묻혔다. 위령탑에 가보면 매몰 사고로 숨진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내가 열 살 무렵 아버지가 다니던 탄광이 문을 닫았다. 연이어 주변의 탄광들이 간판을 내렸다. 목돈을 받아든 광부들이 살 길을 찾아 떠났다. 흥청대던 사북 거리엔 탄가루만이 무심하게 날렸다.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탄광이 문을 닫자 사람들은 거리를 점거하고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사북 항쟁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주장은 폐광에 따른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거였다. 생존을 담보로 한 투쟁이었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도 시위 현장에 나갔다. 현장에 나가면 먹을 것이 생겼다. 학교와 담을 쌓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린 나이지만 어른들이 장난삼아 건네주는 막걸리를 마시고 비틀거리기도 했다. 시위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처음엔 어른들을 따라 구호를 외칠 뿐이었는데 어느덧 나는 시위대의 맨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꼬마 투사라고 불렀다. 그때부터 내 이름은 팔삭이가 아닌 투사가 되었다. 어린 나이지만 투사라는 말을 들으면 힘이 솟았다. 내가 시위대의 전면에 나서자 경찰은 당황해했다. 확성기를 든 경찰이 어린이는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투사이므로 대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투쟁의 강도가 높아지자 정부는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그리곤 시위가 끝났다. 사람들은 이겼다며 환호했으나 난 박수도 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장 먹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사북거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아야 할 사람은 남은 거리. 떠나지도 남지도 못한 나는 거리의 아이가 되었다. 정암사 골짜기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그 바람을 따라 증산 혹은 별어곡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증산에서 불어온 된바람이 사북거리를 지나 정암사로 불 때면 나는 어느덧 만항재 정상에 있었다. 어떤 친구처럼 가족을 따라 안산으로, 또는 서울로도 가지 못한 나는 정암사 계곡의 전나무 숲을 지나 사북의 거리로 내려왔다. 밤은 깊어 걷기도 힘들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별이 떴다. 별을 보면 시집간 엄마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엄마는 총각광부를 따라 대전으로 시집갔다. 사북을 떠나는 날 엄마는 새 신부처럼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처럼 웃을 수 없었다.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널 데리러 올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하고 떠났지만 이젠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가 손수 지었다는 작은 집에서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위가 끝나고 함백산 자락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굴삭기와 덤프트럭이 함백산으로 몰려들었다. 함백산을 뒤흔들던 굴삭기의 굉음이 이번엔 사북에서 울려 퍼졌다. 산으로 올라간 굴삭기는 아버지가 묻혀있는 백운산 자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공사가 시작되자 사북거리는 다시 흥청거렸다. 버려지다시피 했던 집들이 고가에 팔린 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에서 떠돌았다. 어느 날인가는 우리 집에도 집을 팔지 않겠냐며 사람이 찾아왔다. 부동산 중개인은 함께 온 여자에게 이곳이 사람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당한 높이인 해발 700이라고 소개했다. 나도 해피 700이라는 광고 문구를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해피 해본 적이 없다. 해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사북에는 너무 많다. 떠나지 못해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은 비천했다. 집을 보러온 여자가 위치가 맘에 든다고 하자 중개인은 팔 것을 거듭 요구했다. 나는 엄마를 기다려야 했기에 당연히 싫다고 했다.

그 무렵부터 거리엔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았다. 흉하게 파헤쳐진 자리엔 뾰족 모양을 한 거대한 호텔이 들어섰다. 그 호텔 안엔 내국인이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가 있고, 나는 요즘 그 카지노 덕분에 먹고 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시위가 끝나던 날 박수라도 쳐야했던 것이다.

“이야, 경치 한번 끝내준다.”

아랫집에 사는 대포 형이다. 대포는 그의 별명이다. 생긴 것은 못 생긴 감자처럼 울툴불퉁하다. 정순이란 원래 이름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대포라고 부른다. 옛날 대포 형의 아버지가 대폿집을 하던 여자와 바람이 났는데, 그 여자가 낳은 아들이라 하여 그렇게들 부른다. 어쨌거나 하는 행동을 봐서 정순이란 이름보다 대포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렸다. 고작 점심시간을 넘겼을 뿐인데 술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이름값 하나는 제대로 하는 사람이다.

“벌써 해장했어?”

“눈 오는 날은 아무리 먹어도 안 취해.”

대포 형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 아버지는 하나도 안 춥겠다.”

대포 형이 눈 덮인 산을 보며 말했다. 대포 형 아버지의 무덤도 마주 보이는 백운산이다. 대포 형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대포 형 아버지와 함께 묻힌 사람도 다섯이나 되었다. 사고가 나자 탄광은 바로 문을 닫았다.

대포 형이 담배를 빼물며 말했다.

“근데, 오늘은 좀 늦었네?”

“친구 땜에 아침 일은 포기했어.”

“친구? 너한테도 친구가 있었냐?”

대포 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나는“들개라고 형도 알거야. 어제 왔다며 만나재.”라고 대답했다. 대포 형이“들개? 서울에서 깡패 짓한다고 들었는데 뭐 하러 왔다냐?”라며 허공을 향해 연기를 훅 뿜었다. 나는“어제가 들개 아버지 기일이라 내려왔대.”라고 대답했다. 대포 형이 “그 녀석 이젠 철들었나보다. 하긴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한다면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라며 백운산을 바라보았다. 들개 아버지는 80년 봄 사북항쟁 당시 시위대를 이끌던 지도부에 속해 있었다. 그 때문에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결국 그 후유증을 겪다 몇 년 전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를 잃은 들개는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주먹 세계로 진출했다.

대포 형이 눈 쌓인 언덕길을 내려가는 일은 여자를 꼬드겨 하룻밤 자는 일 보다 어렵다고 말했는데 사실이었다. 발뒤축으로 눈을 찍어가며 내려갔음에도 두 번이나 넘어지고서야 시내로 접어들었다. 언젠가부터 사북은 아이보다 어른이 더 많아졌다. 또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다. 그래서 사북엔 아이들이 할 눈싸움을 어른들이 하고 소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할 얼음지치기도 거친 사내들이 한다.

도로는 온통 빙판으로 변해있었다. 차들이 설설 기며 좁은 길을 곡예 하듯 빠져나갔다. 외지에서 온 차들은 아예 젬병이다. 접촉사고를 일으킨 차들은 예외 없이 카지노를 찾은 외지 차량들이다. 이럴 땐 두 다리가 더 쓸모 있다. 넘어진다 해도 벌떡 일어나면 그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빙판을 미끄러진다. 미끄럼 타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어릴 적엔 먹빛 얼음이 깔린 냇가에서 미끄럼을 탔다. 넘어지면 물 얼룩이 지기보다 검은 자국이 남는 먹빛 얼음. 그 먹빛 얼음이 사라진 건 몇 해 전이다. 탄광이 문을 닫기 시작하고 지루한 여름 장마가 몇 차례 있은 후였다.

들개와 만나기로 한 카지노당구장은 번화가에 있는 금은방 2층에 있었다. 작년에 새로 문을 연 곳인데 주인은 제천 사람이라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를 짧게 깎은 들개가 주인과 나인볼을 치고 있었다. 들개가 왔냐? 하며 잠시만 기다려, 했다. 나는 당구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들개가 몸을 낮추며 흰 구(球)로 빨간 구와 노란 구를 때렸다. 돈내기인지 주인이 지폐를 꺼내 당구대에 올려놓았다. 쵸크를 칠한 들개가 다시 몸을 낮추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각도를 재더니 흰구를 쳤다. 이번엔 빨간 구를 맞춘 흰 구가 청색 구를 살짝 스치며 지나갔다. 주인이 오늘 되는 날이로군, 하며 돈을 또 꺼내 당구대에 턱, 소리가 나도록 올려놓았다. 들개의 공격이 이어지자 주인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들개가 주인의 표정을 살피더니 미안했던지 공격권을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주인이 초크 칠을 하며 판돈을 키우자고 말한다. 들개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이 흰 구를 친다. 하지만 주인이 친 흰 구는 검은 구를 건드리며 지나갔다. 검은 구가 또르르, 당구대를 구르자 주인의 얼굴색이 검다 못해 하얗게 변해간다.

“에이 씨팔!”

주인이 욕설을 뱉으며 큣대를 내동댕이쳤다. 들개가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는다. 주인이 다시 큣대를 고르고 있을 때 들개가 오늘은 약속도 있고 하니 그만 치자며 손을 털었다. 주인이 나를 힐끔 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구장을 나온 들개와 나는 근처 다방으로 갔다. 다방은 오전이라 그런지 한가해 보였다. 우리가 들어서자 티브이를 보고 있던 아가씨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어서오세요, 라고 소리쳤다. 들개와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아가씨 둘이 들개와 내 옆에 앉았다. 들개가 커피를 주문하며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대신 아가씨 둘에게는 쌍화탕 한잔씩을 마시라고 했다. 하는 행동으로 보아 역시 들개는 노는 물이 다른 듯 했다. 아가씨들은 그제야 “오빠 고마워.”하고는 티브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커피가 나왔고 들개가 입을 열었다.

“너 카지노 보이라고 소문났던데 사실이냐?”

“응, 자리를 잡아 주고 손님들에게 수고비 받는 일을 해. 블랙잭 같은 건 자리가 없어 몇 시간씩 기다릴 정도거든.”

“카지노 돌아가는 사정은 잘 알겠구나.”

들개가 담배를 빼물며 물었다.

“그런 셈이야. 근데 왜?”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되물었다.

“너의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

들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도움?”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북에 살 때만 해도 몇 해 선배까지는 친구 먹던 것이 들개였다. 그러니 나 같은 존재는 친구라고 언급할 수준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들개가 내게 도움을 필요로 한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날 좀 도와줘야겠어.”

들개의 말에 나는“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게.”라고 말했다.

“이제 보니 팔삭이 너 제법 화통한 데가 있는 걸.”

“그렇게 생각했다면 지금부터라도 팔삭이라고 하지 말고 투사라고 불러줘. 난 오래 전부터 투사였고 사람들도 날 그렇게 불러.”

나는 벅찬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들개가 햐, 요거 봐라 하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좋아.”하고는 말을 이었다.

“팔삭이 보담 남자답고 의리도 있어 보이는 이름이니 앞으론 투사라고 불러주지.” “고마워, 근데 내가 도울 일이라는 게 뭐야?”

“별 일 아냐, 넌 손님만 연결시켜주면 돼.”

들개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투로 말했다. 들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손님이라니?”하고 물었다.

“며칠 있으면 내가 모시는 분이 사북에 전당포를 낼 거야. 그러니 카지노에서 돈 잃고 쩔쩔 매는 놈들을 데리고 오란 말이야. 그 정돈 할 수 있겠지?”

들개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나는 기어드는 소리로“응, 할 수 있어. 카지노에 그런 사람 많거든.”라고 대답했다.

내 말이 맘에 들었던지 날카롭게 빛나던 들개의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들개는 바빠서 먼저 일어나야겠다며 담배를 챙겼다. 나도 카지노로 가야했기에 들개를 따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눈발은 더 굵어져 있었다. 들개는 헤어지기 전“너만 믿는다.”라며 내 어깨를 두어 번 쳤다. 그리곤 맞은편에 있는 농협 건물로 사라졌다.

들개와 헤어진 나는 눈을 맞으며 퀸 미용실로 갔다. 퀸 미용실은 내가 좋아하는 민희가 미용 보조로 일하고 있는 곳이었다. 한 번도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민희는 누가 뭐래도 내 여자였다.

공부에 소질이 있었던 민희가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 때문이었다. 내 아버지와 민희 아버지는 같은 날 백운산에 묻혔다. 최근엔 민희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민희는 그때부터 웃음을 잃어버렸고 말수 또한 부쩍 줄어들었다. 결국 민희는 지겹게 따라붙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용사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은 비록 보조로 일하지만 언젠가는 번듯한 미용실을 차려보겠다는 것이 민희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가하던 다방과 달리 미용실엔 손님이 넘쳐 났다. 눈 때문에 외출을 포기한 여자들이 이참에 머리나 하자며 몰려든 것 같았다. 이미 파마 중인 여자 서넛은 머리에 비닐을 쓴 채 화투를 치고 있었다. 민희는 아직 드라이기를 잡지 못했는지 오늘도 미용실 바닥을 쓸고 있었다. 나는 민희가 일하는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다 카지노로 올라갔다.

들개가 말한 전당포의 오픈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들개를 만난지 일주일 만이었는데 상호는 ‘올인’이었다. 들개는 간판을 걸며“멋지지 않냐?”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다른 전당포들보다 훨씬 멋있다고 말해주었다. 오후가 되자 고급 승용차 두 대가 전당포 앞에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로 다들 검은 양복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린 사람은 여자였는데, 역시 검은색 정장차림으로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사북에 나타나자 거리는 긴장이 감돌았다. 여자는 사내들의 안내를 받으며 전당포로 들어갔다. 여자가 의자에 앉자 들개는 준비했던 서류를 건네주며 그간의 진행상황을 보고 했다. 여자는 들개의 보고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가끔씩 질문을 했다. 그럴 때마다 들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여자가 끝내“준비가 이렇게 소홀해서야 사업이 제대로 되겠어요? 머리를 좀 쓰세요. 머릴!”라며 들고 있던 서류를 검은 양복의 사내들에게 던졌다. 여자의 언성이 높아지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합창을 하듯“죄송합니다!”라며 허리를 구십도로 꺾었다.

여자가 사무실을 나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과 카지노로 올라간 후에도 들개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한때 사북거리를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던 들개도 그들의 세계에선 허드렛일이나 하는 처지에 불과했다. 들개는 눈물까지 떨구며 바닥에 뿌려진 서류를 주섬주섬 챙겼다. 간판을 걸 때만 해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들개는 소금에 절인 야채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그런 들개가 측은하여“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하고 물었다. 들개는 눈물을 훔치며“내 일은 걱정 말고 넌 저거나 더 붙이고 와.”하고 스티커 박스를 가리켰다. 나는 알았어, 하며 스티커 박스를 챙겼다.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들개가“이번엔 그냥 붙이기만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전당포 스티커까지 떼어버려야 해. 알았지?”라고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스티커를 붙이는 일은 양이 워낙 많아 밤늦게까지 해야 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은 영하로 곤두박질 처졌다. 온 몸이 얼어붙었지만 들개가 시킨 일은 마무리 해야 했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도착한 집은 연탄불마저 꺼져 있었다. 잠자리에 누운 나는 춥기도 했지만 전당포에서 본 사내들과 여자로 인해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잠에서 깬 나는 곧장 카지노로 향했다. 밤새 언 몸을 녹이기에는 카지노가 제격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훈기가 감돌았다. 그때까지 게임에 열중인 사람들은 밤을 꼬박 새운 듯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미루어 돈을 제법 잃은 듯 보였다. 하긴 밤 새워 게임을 한 사람치고 돈 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잃은 돈을 만회해 보려는 심산이겠지만 그럴수록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었던 몸이 녹자 잠이 몰려왔다. 나는 블랙잭에 자리 두 개를 예약해두고 잠잘 곳을 찾았다. 구석자리는 장기체류하는 노숙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곳으로 가 눈을 붙였다.

잠든 나를 깨운 건 김도사였다. 그는 카지노 앞에서 난전을 펼쳐놓고 카지노에 있는 각종 게임의 운세를 보아주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블랙잭은 몇 시에 배팅을 하면 좋고 바카라는 몇 시경을 조심하고 슬롯머신은 몇 시 경에 잭팟이 터질 확률이 높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운세가 맞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김도사는 운세를 믿었다가 돈을 잃은 사람들에게 손찌검을 당한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김도사가 카지노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마땅히 돌아갈 곳도 없는 처지에다 그의 운세가 가물에 콩 나듯 맞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김도사지만 정작 본인의 운세는 맞히지 못하는지 복채로 받은 돈을 카지노에 고스란히 쓸어 넣는 인물이기도 했다.

“여기서 밤새웠냐?”

김도사가 물었다.

“아뇨, 아침에 왔는데 추워서 깜박 잠들었어요.”

“이 녀석, 또 연탄불 꺼트렸구나. 그러기에 내가 뭐랬냐. 겨울만큼은 여기서 나와 함께 지내자고 했잖어.”

김도사가 세면도구가 든 가방을 흔들며 말했다. 김도사는 카지노 생활만 5년 째 하는 사람이라 건물 전체가 그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잠자리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건물 내부에서 식사와 샤워까지 해결했다. 호텔 직원 중에서도 김도사 만큼 건물 내부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춥긴 해도 집이 더 편해요.”

“허긴 그 심정 이해가 간다. 집 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겠니.”

집 이야기가 나오니 김도사도 괴로운 모양이었다. 말을 마친 김도사가 쩟, 하고 혀를 차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장인이었던 그는 5년 전 친구들과 함께 카지노를 찾았다가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의 돈까지 잃었다고 한다. 그 일로 김도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카지노 노숙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식사 때가 되었는지 슬슬 배가 고파왔다. 무료로 제공하는 음료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해결한 나는 객장을 돌며 손님들이 남긴 동전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나의 업무도 시작이 되는 셈인데, 이 일 또한 보안요원에게 들키면 쫓겨나게 되니 나름의 요령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은 머신을 비롯하여 비디오 게임기까지 확인했지만 소득은 고작 몇 천원에 불과했다. 동작 빠른 누군가가 벌써 훑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하루 용돈은 건질 수 있었지만 요즘엔 경쟁자가 늘면서 수입 또한 형편없이 줄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객장은 오전부터 붐볐다. 내게 자리를 부탁했던 손님도 예상보다 빨리 나타났다. 나는 그들에게 예약해두었던 자리를 넘겨주고는 전당포로 갔다.

전당포는 오픈 준비로 분주했다. 모두들 짧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있으니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오늘은 어제 보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더 많아 들개를 찾는 일도 어려웠다. 한참만에 들개를 찾았다. 들개는 가죽장갑을 낀 채 화환을 정리하고 있었다. 화환을 보낸 이들은 대개가 대표이사였고 더러는 국회의원과 경찰서장의 이름도 보였다. 여자는 오늘도 검은 옷을 입었는데 어제처럼 정장이 아니라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종종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너 마침 잘 왔다.”

나를 발견한 들개가 돈을 건네주면서 테이프 커팅에 쓸 가위를 사오라고 했다. 들개는 시간이 없는지 빨리 사오라며 재촉했다. 돈을 받아든 나는 주방기구를 파는 집으로 내달렸다. 잠시 후 들개에게 가위를 건네줄 때 검은 승용차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누군지 알 수는 없었으나 차에서 내릴 때마다 검은 양복들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 여자 또한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모처럼 웃는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승용차에서 사람이 내릴 때에는 검은 양복들이 두 줄로 도열하여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이 사무실로 갈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사내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곧바로 오픈 행사가 진행되었다. 전당포 앞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만 있어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이고 누가 경찰서장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오픈 행사는 오랜 시간 준비했던 것에 비해 몇 분 만에 끝이 났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내가 사다준 가위로 오색 종이를 자른 일밖에 없었다. 그리곤 들개만 남기고 사북에서 가장 좋다는 음식점으로 직행했다.

“대단하다. 이런 거 실제로 보긴 처음이야.”

나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했던 인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오늘은 그나마 사람이 없는 거야. 서울에서 이런 거 하면 교통이 마비될 정도거든. 그나저나 이번에 전당포 일이 잘 되면 나도 서열이 올라갈 거야. 그러자면 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날 도와줄 거지?”

“카지노 일이라면 걱정 마.”

들개에게 힘이 되는 일이라면 마다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카지노에서 손님을 모셔 오는 일쯤이야 내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이 있음 전화해. 곧장 달려갈 테니까.”

나는 그럴게, 하고 전당포를 나섰다. 거리로 나온 나는 퀸 미용실로 갔다. 오늘은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민희의 얼굴이라도 보았으면 했지만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점심때라 식사 중인가 싶어 잠시 기다렸지만 민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민희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여자가 하는 걸로 미루어 식사를 하는 게 아니라 주인이 심부름이라도 보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민희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미용실 앞에서 민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거리를 휩쓰는 바람이 몹시 차게 느껴졌지만 참을만 했다. 하지만 한 시간을 기다려도 민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출근을 하지 않은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미용사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민희는 어디 갔나요?”

내 물음에 여자가 나를 곁눈질로 훑어보더니 “걔, 오늘 출근하지 않았어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네에, 그랬군요.” 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여자가 다시 미용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엄마가 아프다나 봐요.” 라고 말했다.

민희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모양이었다. 민희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달리 도울 방법이 없는 게 원인이기도 했다. 민희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돈이었다. 돈만이 민희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는 그늘을 지워낼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돈을 내가 마련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민희도 나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었다. 카지노를 이용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닌 듯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카지노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힘차고 경쾌했다.

오후가 되자 객장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손님들의 손엔 작은 손가방이 하나씩 들려있었으며 그들은 그 손가방에 들어 있는 돈을 다 잃을 때까지 게임을 할 터였다. 게임을 시작하고 초반에 작은 것이라도 터트리지 못하면 준비한 돈을 잃는데 드는 시간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급한 성격의 소유자일수록 그 시간은 더 단축될 것이었다. 나는 손님들의 표정을 살피며 어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객장을 돌며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도 신경을 써야했다. 또한 객장에 들어서면서 나누는 대화도 내겐 중요한 정보였다. 게임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겐 나름의 금기가 있는데, 예를 들면 집에서 나오면서 여자를 봤다거나 차를 타고 오는데 브레이크 잡는 일이 많이 생기는 날엔 어김없이 돈을 잃는 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돈을 잃는 경우는 백 프로였다. 돈을 잃는 시간도 다른 사람보다 배나 빨랐다. 게임을 하기도 전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김도사가 주장하는 게임의 원칙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함부로 지갑을 열지마라, 라는 것이었다. 그는 게임의 운세를 보아 주면서도 그런 점을 특히 강조했다.

시간이 지나자 은행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준비해 온 돈을 잃었다는 증거였다. 은행에 있는 돈까지 잃고 나면 그들의 선택은 둘로 나뉘어 진다. 자신의 못남을 탓하며 카지노를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전당포를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어떤 경우이던 내게는 다 고객으로 보였다.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기회까지 잃게 되면 대개 정신적 패닉 상태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카지노 주변을 맴돌았다. 김도사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예인데 카지노엔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객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소비 심리가 살아나지 않아 경제가 어렵다는 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음에도 카지노만큼은 예외였다. 더구나 오늘이 평일임을 감안한다면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돈을 따서 돌아가는 확률은 극히 낮았다. 어쩌다 돈을 딴다 해도 결국엔 더 많은 돈을 잃게 되는 것이 카지노의 현실이었다.

나처럼 카지노에 살다시피 하는 사람은 손님들의 표정만 봐도 그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짐작이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석자리에서 전화기를 잡고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미 은행에 있던 돈까지 잃은 사람들이었다. 친구나 아는 사람에게 돈은 빌려달라는 게 전화의 내용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 들개에게 연락을 했다. 전당포에 대기하고 있던 들개는 차로 그들을 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객장으로 들어섰고 호기 좋게 게임을 시작했다.

보름이 지났다. 카지노에서 고객을 유치하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돈을 잃은 사람들은 내가 내미는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들개는 그들이 빌리는 돈의 금액과 관계없이 건당 얼마씩 계산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내 주머니엔 돈이 모이지가 않았다. 나 역시 좀 더 큰 돈을 마련해보기 위해 수입의 많은 부분을 게임기에 들이 밀었던 때문이었다.

“너 요즘 꽁지 짓 한다며?”

김도사였다. 그는 막 식사를 하고 나오는지 이쑤시개를 물고 있었다.

“예, 친구가 도와달라고 해서요.”

“난 네가 그런 일 안했으면 싶다.”

“왜요?”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분은 좋지만 그건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그 사람의 가정까지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이야. 날 봐라. 돈 때문에 가족을 물론이고 친구까지 다 잃고 말았잖니.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생겨야하겠니.”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도 어디에서든 돈을 구할 겁니다. 저는 그들을 돕고 있는 거구요.”

“그건 돕는 게 아냐. 그들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 일일 뿐이야. 너도 기억하잖니. 카지노에서 돈 잃고 자살한 사람들 얘기 말야.”

“하지만 나도 돈이 필요해요.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한거구요.”

“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어. 그리고 넌 투사잖니. 투사란 부조리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이름이야. 그러나 지금의 네 모습은 투사가 아니라 돈 잃은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주릅꾼일 뿐이야.”

김도사의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요즘의 내 모습은 투사의 삶과는 너무도 달라보였다. 투사라고 떠벌렸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김도사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그렇다고 의기소침해 할 건 없어. 지금의 네가 너의 본 모습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하고 객장으로 들어갔다.

김도사의 말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카지노를 나와 집으로 갔다. 그리곤 사흘 동안 문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김도사의 말을 하나하나 되새김질하며 투사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명쾌한 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을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포 형이 그런 나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혼자 있고 싶으니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이 더 흘렀고 그 사이 사북엔 많은 눈이 내렸다. 민희라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줄 것 같았다. 나는 눈길을 헤치며 퀸 미용실로 갔다. 그러나 민희는 그 날도 출근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눈이 그친 어느 날 들개가 찾아왔다. 나는 들개에게 몸이 아파 카지노에 나가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들개는 나 때문에 영업에 지장이 있다며 다시 손님을 끌어와 주길 부탁했다. 나는 들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내일부터 일을 하겠다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김도사의 말 정도는 무시해야만 했다.

눈이 녹으며 거리는 제 모습을 흉하게 드러냈다. 오픈을 알리는 유흥업소의 광고지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이 뿌려져 있었다. 광고지엔 하나같이 벗은 여자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달라고 투쟁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게 해 달라고 투쟁한 결과가 낳은 병폐 중의 하나였다. 먹고 사는 것은 곧 자본의 논리였고, 그 자본은 가끔 사북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탄가루가 씻겨 내려간 자리엔 어김없이 여관이나 술집이 둥지를 틀었으며 안마시술소 같은 유흥시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퀸 미용실은 손님으로 붐볐지만 민희의 모습은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미용실에 들어가 민희의 근황에 대해 물었더니 그만 둔지 닷새나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곧장 민희네 집으로 달려갔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집은 조용했다. 가지런히 놓여진 민희의 신발만이 그녀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한 시간이나 집 앞을 서성이다가 카지노로 올라갔다.

객장의 풍경은 여전했다. 잭팟을 알리는 종소리도 그러했고 현금을 지급하며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직원의 표정도 여전했다. 하지만 객장엔 잭팟을 터트리며 환호하는 사람보다 탄식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객장을 돌았다. 객장엔 고객들로 보이는 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돈이 필요하시면 따라 오십시요.” 하고 말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만큼 다급한 그들은 내 말에 이끌려 전당포로 갔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일하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전에는 미안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들지 않았다. 김도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돈을 모아야했기에 게임도 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짓은 한번으로 족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한 남자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그는 이미 전당포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있는 것은 여자 밖에 없다며 여자도 맡길 수 없냐고 물어왔다. 내가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곧장 들개에게 그런 사실을 전했다. 들개는 흔쾌히 가능하다고 했다. 그 남자는 곧 바로 전당포로 갔고 자신의 여자를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렸다. 남자는 약속한 기일 내에 여자를 찾아가지 못했고, 그 여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에게 몸 수발을 하다가 결국엔 어디론가 팔려갔다.

전당포가 영업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당포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한 사건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부터였다. 사람들도 둘만 모이면 전당포의 횡포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곤 했다. 들개가 가장 많이 욕을 먹었지만 개중엔 나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도 있었다. 내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하지만 그런 비난을 받으면서도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던 것은 순전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겨울이 끝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들개가 내게 민희의 집을 아냐고 물어왔다. 민희의 집을 찾는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들개의 말인즉슨, 민희가 한 달 전에 자신의 몸을 저당 잡히고 엄마 수술비를 빌려갔는데 이자도 갚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희가 빌려간 돈의 액수를 물어보았다. 들개가 검지를 펼치며 큰 거 한 장이라고 했다. 나는 “천만 원?”하고 되물었다. 들개가 그렇다며 얼른 민희의 집이나 알려달라고 말했다. 들개의 말은 내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나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들개가 재차 물었을 때에야 나는 정신을 차리며 모른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들개와 헤어진 나는 민희네 집으로 갔다. 하지만 집은 굳게 잠겨 있었으며 민희의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민희네 집 사정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민희를 찾아 나서보았지만 사북에서 민희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들개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로부터 혼까지 났다며 민희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갔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다음 날이었다. 민희의 친구로부터 사북역에서 민희를 봤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민희의 집으로 달려갔다. 들개가 그 사실을 알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민희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실려 가고 말았다.

나는 들개를 만나러 전당포로 갔다. 들개라면 민희를 구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마침 들개는 전당포에 있었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와 무슨 얘긴가를 나누고 있었다. 민희에 관한 이야기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할말이 있다며 들개를 밖으로 불러냈다.

“민희를 풀어줘.”

내 말에 들개가 놀란 눈을 하고 “민희를? 너 지금 미쳤어? 그 앤 우리 돈을 떼어 먹으려고 했던 아이야.” 했다.

“민희가 빌린 돈은 내가 갚겠어.”

나는 그동안 모은 돈을 들개에게 내밀었다. 2백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들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늦었어.” 라며 고개를 저었다.

“늦다니?”

“이미 거래가 끝났어. 지금 그 애를 되찾으려면 1억은 있어야 가능할 거야. 민희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아.”

민희가 벌써 다른 곳으로 넘겨졌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젠 들개에게 부탁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좋아, 민희가 어디로 갔는지라도 알려줘.”

“너 보기보다 미련하구나. 우리가 언제 그런 거 알려주는 거 봤니? 정신 차리고 카지노에나 올라가봐.”

말을 마친 들개가 담배를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들개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던 들개가 손을 부르르 떨며 상대에게 “진짭니까?” 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상대방이 그렇다고 대답했는지 들개의 얼굴이 검붉게 변했다. 전화를 끊은 들개가 내 손에 있던 돈을 빼앗듯 가져갔다. 그리곤 “너 날 따라와.” 하며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나는 “무,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들개가 “민희년이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렸다는데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구먼. 아까 네가 민희 돈을 갚겠다고 했잖니? 그럼 이제라도 갚아.” 라며 나를 전당포로 끌고 갔다.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들개에 의해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 앞에 무릎꿇림을 당했다.

“이 친구가 민희년 돈을 대신 갚겠답니다.”

들개가 내 손에서 빼앗은 돈을 여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자가 고마운 일이로군, 하며 5천만 원이 적힌 차용증을 내밀었다. 내용 중엔 빌린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신체를 포기 한다, 라는 섬뜩한 문구도 보였다.

“사인해.”

들개가 말했다. 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들개를 올려다보았다. 들개가 “사인하라는데 뭐해 새꺄!”하며 발로 등을 내리 찍었다. 나는 컥,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예전의 들개와 나 사이가 그러했었으니 맞는 게 억울하진 않았다. 나는 민희가 죽었어 민희가, 라고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곤 들개가 건네주는 펜으로 나동민이라는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 생각해보니 내 이름은 나는 팔삭이도 투사도 아닌 나동민이었다. 잊고 살았던 이름을 이제야 기억해 내다니. 참으로 무심한 세월이었다.

전당포를 나온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로 가야하지? 라고 내 자신에게 묻고 있는데 뒤에서 “야, 새꺄! 카지노 안가고 뭐해?” 라는 들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개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투사라고 부르지 않고 “야, 새꺄!” 라고 불렀다. 들개와 나의 사이를 적절하게 표현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카지노를 향해 걸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오늘부터 내 이름은 팔삭이도 투사도 동민이도 아닌 <야, 새꺄>이다. 그럼 넌 지금 뭐니? 똥개니? 발바리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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