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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말기 선고받은 아버지에게 "위궤양"이래요
제목 위암말기 선고받은 아버지에게 "위궤양"이래요
작성자 강기희 (ip:)
  • 작성일 2008-08-31 2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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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가을 가을이 되면 아버지 생각에 잠 못드는 날이 있다.
ⓒ 강기희
아버지

10년 전인 1998년, 일흔넷을 맞은 그해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강원도 정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고향에 살고 있던 큰 형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생전 돌아갈 곳이 사라진 아버지. 막내 아들인 나는 우연히 영월 땅 주천강변에 빈집이 있음을 알았고, 작은 형과 함께 그 집을 수리해 그해 5월 부모님을 모셨다.

 

어느 날 말기 암 선고 받은 아버지

 

담장이 둘러쳐진 집은 낮잠을 즐기기 그만인 대청마루가 있었으며, 텃밭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마당도 있었다. 마당엔 키 큰 호두나무까지 있어 나는 그 아래에 널다란 평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평상에선 마을 어른들이 모여 10원짜리 고스톱을 쳤다. 

 

시골로 내려온 아버지는 괭이로 마당을 손수 일구어 고추와 옥수수 토마토 등을 심었다. 아버지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보는 삶의 여유였다. 일흔을 넘길 때까지 아버지의 지난 삶은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했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대를 발버둥치며 살아왔던 아버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왔던 아버지는 서울을 떠나자 비로소 어깨에 올려져 있던 지난 삶의 편린들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황혼을 맞이한 노인처럼 아름다웠고 스스로도 행복해 했다.

 

그해 가을 아버지는 얼마간의 고추를 땄으며 그 고추는 매운 고추가루가 되어 아들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겨울이 갔고, 이듬해 2월 말 경 아버지께서 병원에 가봐야 겠다며 버스를 타고 도시로 올라오셨다. 경기도 수원의 한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아버지는 금방 환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이틀 간 내시경 검사와 조직 검사를 받은 결과 아버지의 병명은 위암 말기였다. 의사는 "길어야 5개월이니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면서 눈앞이 아득해졌다. 애써 정신을 차리며 의사에게 물었다.   

 

"방법은 없나요?"

"글쎄요, 수술을 한다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확률은요?"

"죄송합니다. 너무 늦은 상태라 그 또한 단언할 수 없습니다."

 

수술을 할 것인지 그냥 퇴원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한 후 결정하겠다고 말한 후 병실로 돌아왔다. 이틀을 병실 침대에서 보낸 아버지는 좀이 쑤시는지 수시로 담배를 태우러 밖으로 나가셨다. 하루 세 갑 넘는 담배를 태우던 아버지에게 내려진 형벌은 폐암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위암이었다.

 

아버지의 병이 위궤양이라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들

 

여덟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단한 일생을 살아왔던 아버지. 잠시 후 아버지는 담배 냄새를 풍기며 병실로 돌아왔다.

 

"검사 결과가 나왔냐?"

 

아버지가 물었다.

 

"아직이요."

 

사실대로 말씀 드릴 수 없었다.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속 좀 아픈 걸 가지고 뭔 결과가 그렇게 늦는다냐"하면서 당장이라도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내려갈 듯 옷가지를 챙겼다.

 

"점심 시간을 넘기면 결과가 나온다니 그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니 어미가 혼자 계시잖냐? 빨리 내려가 봐야 해."

 

아버지보다 아홉살이나 적은 어머니. 하루에도 몇 번씩 아옹다옹 다툼을 하는 사이였지만 혼자 계신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옆집 할머니와 함께 주무신다니 걱정마세요."

     

점심 식사가 나왔다. 식사를 하는 아버지의 손은 주사 자국으로 핏기가 선명했다. 주사 바늘 꽂을 자리도 없이 망가진 아버지의 몸. 입원을 하자마자 병원측은 영양제를 놓았지만 주사를 놓으면 아버지의 핏줄은 5분도 되지 않아 터졌다. 주사 바늘은 그렇게 다른 핏줄을 찾아 다니다 결국엔 주사 맞는 일까지 그만 두었다.

 

아버지의 몸이 그렇게 망가질 때까지 아들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지 못했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아버지의 생이 5개월밖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울컥, 눈물이 솟구쳐 병실을 나왔다. 

 

아버지가 계신 병실을 바라보며 거푸 몇 개비의 담배를 태웠다. 어찌해야 할지 답도 나오지 않았다. 작은 형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병명을 알렸다. 답이 없기는 작은 형도 마찬가지였다. 단 1%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수술을 하는 게 좋다는 말을 하다가도, 그러다 수술이 실패해 고통스럽게 돌아가시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나왔다.

 

젊은 사람도 생존 확률이 낮다는 위암 말기. 결국 아버지가 수술을 할 것인가 퇴원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결정은 내가 내려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수없이 많은 답을 내렸다가도 금방 그 답을 번복하곤 했다.

 

눈물이 소리도 없이 흘러내렸다. 중대한 결정을 혼자 내려야 하는 게 무섭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울고 있는 나를 힐긋거렸다. 발치로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갔다. 나는 마지막 남은 담배까지 태우고 나서야 결심을 하고 병실로 갔다.

 

"아버지, 결과가 나왔는데 위궤양이라고 하네요. 그러니 퇴원해도 된데요."

 

나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주사 바늘조차 꽂을 수 없는 아버지의 몸에 칼을 대고 싶지는 않았다. 곱게 사시다 살아온 몸 그대로 간직한 채 돌아가시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온 나의 거짓말은 그렇게 시작됐고, 그 거짓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아버지가 위암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들뿐이었다. 외로운 일이었다.

 

  
▲ 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받은 약이라 아들이 지금껏 보관하고 있다.
ⓒ 강기희
위암

 

죽음 하루 전 다시 찾은 병원에서도 아들은 거짓말을 할 뿐

 

약은 보름에 한 번씩 병원에 와서 타기로 했다. 우선은 보름치 약을 타 아버지를 모시고 주천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가벼운 위궤양으로 알고 퇴원을 하셨던 터라 기분이 좋았던지 어느 때보다 자주 웃으셨다. 그러나 그 시간 나는 마음 속으로 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병원을 나설 때 길어야 5개월 사신다는 아버지는 그해 봄에도 마당에다 고추를 심었고, 호두나무 아래에서는 마을 어른들의 고스톱판도 연일 벌어졌다. 아버지는 외롭지 않았고, 아들인 나는 그런 이웃이 고마워 과일과 과자를 사날랐다.

 

아버지는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단풍이 산을 물들일 무렵인 시월 중순 세상을 뜨셨다. 아들만 알고 있는 병을 몸에 단 채 쓴 약을 삼키며 버틴 지 8개월 만이었고,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마당엔 고추가 붉게 익어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손길은 더이상 텃밭으로 향하지 못했고 지붕 위의 호박도 쓸쓸하게 익어갔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 아버지는 몸 상태가 심각함을 느꼈는지 병원에 가보자며 손수 이불과 세면도구를 챙겼다. 병이 있다면 수술이라도 해서 나아야겠다는 뜻이었다. 삶의 집착. 그것은 아버지가 보여준 생의 마지막 몸부림이자 집착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간 병원은 원주 기독교 병원.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완벽한 거짓말을 완성하기 위해 의사들부터 만났다. 아버지께 병명을 사실대로 말하지 말기를 당부하고는 아버지와 의사를 만나러 갔다.

 

"몸이 많이 아프시죠? 연세가 있는 분들은 다들 그 정도는 아픕니다."

 

의사는 그런 정도의 말만 했다. 아버지는 진찰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다른 의사를 또 만나야겠다고 했다. 진땀 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의사를 만났고, 아버지는 의사들로부터 아무런 병명도 듣지 못했다.

 

"이 놈들이 뭘 숨기는 게 틀림없어."

 

병원을 나서면서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아들은 아버지의 서울행을 막아섰다. 그러는 아들의 눈엔 눈물이 고였고, 목이 잠겨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뭔가 사태를 짐작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아버지는 이불을 챙겨 집을 떠날 때의 활기찬 모습과 달리 집으로 돌아올 때는 풀이 잔뜩 죽은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말을 잊고 창밖만 응시했다. 아들이 아무리 웃기는 말을 해도 아버지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 유품 아버지의 유품으로 중절모와 시계 안경을 간직하고 있다.
ⓒ 강기희
유품

"아버지 곁에 묻히는 날 거짓말한 것 용서 빌게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알았을까.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아들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며 눈물을 떨구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 아버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통장을 정리했고, 받을 돈과 줄 돈을 정리했다. 하지만 원죄가 있는 나는 눈물을 속으로 삼킬 뿐 밖으로 흘리지 못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타박하셨다. 답답하고 무거운 시간이 흘러갔다. 뜬 눈으로 밤을 보낸 나는 아버지 약을 타기 위해 수원으로 갔고, 친구에겐 아버지 영정 사진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받은 약은 아버지의 아픈 몸을 낫게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내 책상 서랍에 남아 있다.

 

내가 주천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덥고 편안하게 잠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손만은 꼭 쥔 채였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펴 보았다. 그런데 내가 도착하기 전에 아무리 펴려해도 펴지지 않던 아버지의 손이 스르륵 펴지는 것이었다. 그때 내 귀엔 아버지가 "니가 왔으니 내가 이제야 눈을 감을 수 있겠구나" 하고 말하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장면을 본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시 깨어나실지도 모르니 잠시 더 기다려 보자며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한번 먼 여행을 떠난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 장편소설 <은옥이> 작가 후기 중에서

 

나는 그 무렵 출간한 소설의 작가 후기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약을 타러 갔다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의 손을 곧게 펴주는 일로 거짓말한 것을 씻으려 했다. 하지만 한 번 눈을 감은 아버지는 늦게 도착한 아들을 따듯하게 품어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죽음을 맞고서야 꽃상여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름다운 단풍이 환장하게 피어나던 날 아버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곁에 묻혔다. 긴 여행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처럼 아버지는 혼령이 되어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아가, 이제 왔느냐. 사느라고 고단했지?"

 

할머니가 아버지를 품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그때 나는 조병화 시인이 미리 만들어 놓았다는 묘비의 글을 생각했다. 조병화 시인은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갑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아버지도 심부름 마치고 돌아가서는 할머니 품에 안기면서 오랜만에 응석을 부리며 뜨거운 흘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병명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그 시절, 나는 거짓말도 때로는 희망이 될 수 있고 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이젠 용서를 구하는 것도 어려워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 곁에 묻히는 날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때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라며 용서를 구해야 겠다.

 

  
▲ 흔적 어릴 적 아버지와 살던 집은 무성한 잡초만 남았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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